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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검세리(儉世里)

11. 검세리(儉世里)
본읍(本邑)의 동남쪽 변두리 낙동강(落東江)변에 위치한 동리이다.
동리(洞里) 뒷쪽에 솟아 있는 일부 산악지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철길 안의 수리안전답과 바깥의 저습지로 구성된 지대이다. 낙동강(落東江)의 본류가 "ㄱ"자(字)로 꺾이어 남쪽으로 흐르는 강안(江岸)을 끼고 있어 옛날부터 강물의 범람이 잦은 상습 수해 지대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토목기술의 발달로 견고한 제방(堤防)과 양수시설(揚水施設)이 갖추어져 가경지가 늘어나고 수해의 위험도 줄어 들었다.
동리(洞里)의 북쪽은 산을 사이에 두고 율동리(栗洞里)와 경계를 지었고, 동쪽에는 안태리(安台里)와 인접해 있다. 남쪽에는 낙동강 본류를 사이에 두고 김해군(金海郡) 생림면(生林面)과 군계(郡界)를 이루고 있으나 도요나루를 통하여 왕래가 편리하고 서쪽에는 저습지대를 가로 질러 송지리(松旨里)와 이웃하였다.
이 동리(洞里)의 중심 부락인 검세(儉世)는 북쪽 산기슭에 위치해 있는데 큰검세(大儉), 작은 검세(小儉), 후검세(後檢) 등 세 땀으로 나누어져 있고, 송원(松阮)부락은 송지(松旨)에 인접한 신송(新松)과 강가의 철길 연변에 자리잡은 작원(鵲院)을 합친 행정 부락 이름이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시에 검세(儉世)와 송원(松院)을 행정 부락으로 하고 검세리(儉世里)로서 법정리로 삼았다.
동리(洞里) 한가운데를 율동천(栗洞川) 안태천(安台川)이 통과하여 작원(鵲院) 앞에서 낙동강(落東江)에 흘러 드는데 남단(南端)의 강 가 벼랑에 있는 작원관(鵲院關) 요새는 金鵲의 전설과 임진왜란(壬辰倭亂)때의 전적지로 유명하다.
(1) 큰검세 (大儉 本儉世)
동리(洞里)의 북쪽 산기슭에 있는 가운데의 마을이다. 세 검세 땀 가운데서 가장 중심되는 마을이라 하여 "큰검세" 또는 본검세라고도 한다. 옛날에는 마을 직전까지 강물이 들어오는 저습지였으나 지금은 철길과 제방이 튼튼하여 마을 앞이 광할한 일등호답(一等好畓)으로 변하였다.
"검세"라는 지명 유래는 "까치원"의 전설과 연관되는 것으로 까치원의 금새(金鳥)가 이 곳으로 날아 왔다는 데서 애초에는 금새로 불렀다는 것이다. 그 후 이곳은 수해 상습지대가 되어 마을이 매우 곤중했는데, 어느날 이름 높은 감여가(堪輿家)가 지나가다가 마을 이름을 검세(儉世)로 고치게 하고 동민들이 근검하게 세상을 살도록 권유하고 떠나 갔다는 설화가 있다. 그리하여 검세(儉世)가 된 후에 이 마을은 잘 사는 부자 동네가 되었다고 한다.

○ 작원 검세 (小儉, 儉谷, 접시골)
본검세(本儉世) 마을 동쪽에 있는 부락이다. 큰 검세 부락에 대칭되는 이름으로 검곡(儉谷)이라고도 한다. 또 부락 뒤 골짜기가 마치 접시처럼 생겼다고 하여 접시골이라는 다른 이름도 있다.

○ 후금(後儉 후주금, 후소금)
본검세 마을 서쪽에 있는 부락이다. 부락 입구에 위치한 독뫼산 뒷쪽이라고 하여 뒷검세라는 뜻에서 후검(後儉) 또는 후주검, 후소검이라 불렀다.

(2) 송원동(松院洞)
검세리(儉世里)에 속한 행정 부락의 이름으로 삼랑진(三浪津)역 동편에 연접한 신송(新松)과 도요나루 강변 벼랑 가에 위치한 작원(鵲院)마을을 합하여 송원동(松院洞)이라 한 것이다.
신송(新松)은 낙동강(落東江) 충적토(沖積土)로 이루어진 일제시대(日帝時代) 이래의 신생(新生) 마을이며, 작원(鵲院)은 본래 안태리(安台里)에 속했던 땀인데 행정 구역 조정으로 한 부락에 편입된 것이다.

○ 신송 (新松 모래등 沙嶝 松園)
삼랑진(三浪津)역 동편에 있는데 송지리(松旨里) 마을에 뾰족하게 침입한 모래등 마을이다. 송지리(松旨里)를 내송(內松), 외송(外松), 후송(後松)으로 나누고 있는데 이 땀도 송지(松旨)에 연접했다고 하여 신송(新松)으로 했으나, 행정구역은 검세리(儉世里)에 편입했다. 원래 낙동강(落東江)의 모래가 밀리어 충적토(沖積土)를 이룬 지대로 모래등 (沙嶝)이라 불렀다. 1910년 경에 일본인(日本人)들 수호(水戶)가 이 곳에 정착하여 밭을 개간하고 과수원을 일구어 송지원(松旨園)이라 이름지었다. 그 후 송원(松園)이 되었다가 송지(松旨)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뜻에서 신송(新松)으로 불렀다.
위치는 비록 송지리(松旨里)와 연접해 있으나 행정 구역으로는 검세리(儉世里), 송원리(松院里)에 속해 있다.

○ 작원 (鵲院, 까치원)
동리(洞里) 앞 낙동강(落東江)이 "ㄱ"자(字)로 꺾이는 지점 강언덕에 위치한 부락으로, 행정적으로는 송원동(松院洞)에 속한다.
이곳에서 약 500m 철길을 따라 내려가면 양산군(梁山郡)과 경계 지점에 작원관(鵲院關)이 있었는데 마을 이름은 여기에서 파생된 것이다.
작원(鵲院)관은 낙동강(落東江)과 절벽을 끼고 있는 천험적(天險的)인 요새이며 고대(古代)부터 교통상 국방상의 관방지(關防地)로서 특히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의 전적지로 알려져 있다. 옛날에는 한남문(悍南門), 공운루(拱雲樓)와 같은 건물이 있었고, 지금은 마을 근처에는 역원(驛院)과 나룻터 객주집과 주막도 있었다고 한다.
작원(鵲院) 곧 까치원이라는 지명에 대하여는 두 가지 유사한 전설이 있다. 그 하나는 신라(新羅) 때 어느 임금이 만어사(萬魚寺) 행차를 위하여 김해(金海)에서 배를 타고 이 곳 나루를 건넜을 때 깎아지는 절벽 위에서 까치떼가 지저귀며 임금 일행을 환영하여 맞이했으므로 까치원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삼국(三國)시대 때 신라의 김유신(金庾信) 장군이 이곳에서 백제(百濟)의 군사를 맞아 싸웠는데 백제의 임금이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부왕(父王)을 따라 종군한 백제의 공주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하여 홀연 금까치 (金鵲)로 화신하여 적장인 김유신(金庾信) 장군의 영기(令旗) 끝에 앉았다. 금빛이 찬란한 까치가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신라의 군진(軍陣)을 교란시킴에 신라군의 전황이 불리해지고 백제 임금은 무사히 도망쳤다. 이에 화간 난 장군이 활을 쏘아
금까치를 적중(的中)시키니 금까치는 푸르르 검세(儉世) 쪽으로 날아가고 땅바닥에는 미녀(美女)의 시체가 나둥구러졌다. 그 후에 금까치가 날아간 마을을 금새 (金鳥)라 했고, 이 곳을 까치원이라 했다는 것이다.

○ 원추암 (員墜岩)
작원관(鵲院關)에서 양산(梁山) 쪽으로 넘어 가는 절벽의 길 가에 있었던 바위의 이름이다. 옛날에는 황산도(黃山道)에 이르는 유일한 통로로서 강 가의 높은 절벽을 파고 잔도(棧道)를 만들어 지나가는 위험한 곳이었다. 조선조(朝鮮朝) 초기에 어느 고을 수령 (員이라고 했음)이 이 잔도(棧道)를 지나 갔는데, 절벽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니 천길 낭떠러지에 짙푸른 심연(深淵)이 어지럽고 무서워서 그만 발을 헛디디어 물 속에 빠져 죽고 말았다. 원이 떨어져 죽은 바위라고 하여 원추암(員墜岩)이라 했는데 철도개설 공사 때에 그 지점의 현상이 모두 바뀌어 지금은 확인할 길이 없다.

○ 노적바위 (露積岩)
신송(新松)에서 작원(鵲院)부락 사이 낙동강 가에 우뚝 솟아 있는 바위의 이름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왜적을 속이기 위하여 이 바위에 짚섬을 둘러 곡식의 낟가리처럼 위장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중다리와 처자다리 (僧橋 處子橋)
신송(新松)과 작원(鵲院)부락 사이 낙동강(落東江)변에 있었던 다리 이름이다. 옛날 동래부(東萊府)에서 한양(漢陽)으로 가는 국도변의 교량으로서 밀주(密州)주지에는 사포교(四浦橋)라 했다. 그 가운데 중다리는 승교(僧橋)를 뜻하는데 행곡천(杏谷川)(일명 僧川) 하류에 가설된 것이고, 처자다리는 처자교(處子橋)를 뜻하며 우곡천(牛谷川) 하류에 가설된 것이다. 중다리는 목조교량이었으므로 진작 파괴되어 없어지고 처자다리는 석조의 아취다리이므로 강변에 반쯤 매몰된 채 원형이 남아있다.
이 두 교량에 얽힌 전설이 있다. 옛날 작원(鵲院)관 근처에는 조그만한 절이 있어 한 중이 살았는데 근처 마을의 미모의 한 처녀를 연모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에 두 남녀는 서로 사랑을 걸고 교통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하여 다리 놓기 시합을 벌이기로 했다. 중은 杏谷川 다리를 맡았고, 처자는 우곡천(牛谷川) 다리를 맡아 작업을 시작했으나 중은 처자의 연약한 노동력을 깔보고 교만을 부리고 있는 사이에 처녀가 먼저 교량을 완성했다. 중은 부끄러운 나머지 자기 몫의 다리를 완공하고는 잘못을 뉘우치고 처녀에게 사과한 후 그 절을 떠나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한다. 그 후부터 마을 사람들은 중다리와 처녀다리로서 소중히 보존하며 그 이름을 지켜오게 된 것이라 한다.

○ 강가들(江邊들)
검세 앞 낙동강(落東江) 가에 있는 들 이름이다.

○ 강더듬
검세(儉世) 본땀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이름인데 밤골 마을로 가는 길목이다.

○ 검세앞다리(儉世前橋)
검세마을 앞에 있는 다리인데 옛날 부터 있어온 재래식 다리이다.

○ 고랑골짝(溝谷)
검세 마을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골짜기에 고랑이 깊이 패여져 있어 생긴 지명이다.

○ 까골
검세(儉世) 마을 강더듬 북쪽에 있는 골짜기의 지명이다. 그 아랫쪽 지점에 오래된 조개껍질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 당산(堂山)
검세 마을 앞 포구나무정에 있는 당산인데, 해마다 10月 보름날에 마을 사람들이 치성을 드려 동네의 평안을 비는 당산제를 올리고 있다.

○ 배수장껄(배수장가)
검세 마을 동쪽 배수장 근처에 새로 생긴 마을 이름이다.

○ 조새암다리
검세(儉世) 마을 앞에 있는 다리 이름이다. 일명 쪽다리라고도 하며 개천 위에 가설된 옛날 다리이다.

○ 진등대 (長嶝)
검세 마을 서북쪽에 있는 산등성이인데 그 등대가 길게 생겼다고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큰고개 (大峴)
검세 마을에서 밤골마을로 넘어가는 고개이름이다. 고개마루가 길고 크다하여 큰고개라 한다.

○ 포구나무정자
검세 마을 앞에 있는 정자껄이름인데, 수백년이나 되는 수령의 포구나무가 서 있다고 하여 생긴 지명이다.

○ 흰고개만댕이(白峴頂)
검세 마을 고랑골짝 북쪽에 있는 산등성이 이름이다. 고개 위의 흙빛이 희다고 하여 생긴 지명이다.

○ 구덩대(九嶝)
검세 마을 뒤쪽에 있는 산등성이의 지명으로, 옛날에 당집이 있었다고 하여 생긴 지명인데, 구천(九天)듬에서 아홉번째 산등성이에 해당된다.

○ 구천대미(九天崖)
검세(儉世) 마을 뒤쪽에 솟아있는 구천산(九天山)의 별명으로, 산이 구중천(九重天)으로 험하고 높다 하여 생긴 지명이다.

○ 야시방우(狐岩)
검세(儉世) 마을 뒷쪽 구등대 중간지점에 있는데 여우가 사는 굴이 있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야시는 여우의 사투리이다.

○ 당만댕이(堂山頂)
검세(儉世) 마을 구등대 중턱에 있는데 지금은 어린이들의 놀이터가 되어 있다.

○ 금구덕이 (金穴)
검세(儉世) 마을 서쪽 가에 있는 구덩이인데, 1978년경 이곳에서 전답을 개간하다가 땅 속에서 석함(石涵)을 발견하였다. 석함(石涵) 속에는 삼국시대 때의 부장품 유물이 많이 나왔는데 문화재를 취급하는 관계공무원이 현장을 조사하고 유물을 수습했다고 한다. 금(金)과 같이 귀한 보물이 나온 구덩이라 하여 생긴 지명이다.

○ 미등걸 (山嶝)
검세(儉世) 마을 서쪽 등대배기에 있는 석굴(石窟)이다. 이 근처에는 이와 비슷한 형태의 석굴(石窟)이 여섯 군데나 있는데, 선사시대(先史時代) 사람의 주거 유적으로 알려지고 있다.

○ 닷섬지기 (五石斗落)
검세(儉世) 마을 앞에 있는 들 이름인데, 닷섬지기 넓이의 논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논 한섬지기는 열 마지기이며 한 마지기의 넓이는 약 200평이다. 닷섬지기의 넓이는 약 1000평에 해당된다.

○ 통시껄 (厠街)
검세 마을 앞에 있는 들이름인데, 옛날 이곳에 야외뒷간이 있었다고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쟁피웅딩이 (菖蒲溜)
검세 마을 앞, 통시껄 서쪽에 있는 들 이름인데, 옛날 창포(菖蒲)가 많이 자생(自生)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쟁피는 창포의 사투리이다.

○ 강상다리 (江上嬌)
지금의 송원(松院) 마을 뒤쪽에 있었던 다리로서, 부교(浮僑)엿으나 지금은 지명만 남았다. 강 위에 놓인 다리라 하여 생긴 지명이다.

○ 후주굼굼티기
검세 마을 서쪽에 있는 들 이름이다. 지금의 후검(後儉) 마을 앞들이다.

○ 가매바우 (轎岩)
작원(鵲院) 마을 뒷산에 있는 바위인데 가매(가마)같이 생겼다고 지어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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